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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수호 성인
황석두 루카
1
작성자
비아동성당 수호성인



(황석두  루카의  초상)


(황석두 루카의 묘)


 

 일명 재건으로  불리는 황석두 루카는  충청도 연풍에서 부유한   외교인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그를 정성껏  공부시 켰을 뿐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 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어다. 20세가  되던 해 석두는 종을 하나  거느리고 말에   올라 과거시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저녁 한  주막에 들어가 묵고 있었는데, 그 때  어떤 천주교 신자를 만나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오랫동안 듣게 되었다. 젊은 석두는 그토록 유식한 교우의 말에  크게 감영을 받고 그의 주선으로   천주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만에 아버지에게로 되돌아왔다. 

    아버지는 놀라 이상히  생각하자, 과거시험을 일찍 치르고  왔다고 말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늙으신 아버지는  거짓말임을 알아차리고 계속  캐물은 끝에 자기  아들이 되돌아온 근본동기를  알 게  되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렸으나  석두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천주교 교리책을 배우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자기  부인을 영세 입교시키고 집안 몇 사람까지  개종시키었다. 

    한편 늙으신 아버지는 이 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잘 알고, 또 천주교가 가문을  파괴하는 종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격분한 나머지 석두를 불러, "어느 양반집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단 말이냐? 이제부터 다시는 천주교 교리공부는 못한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석두는 "죽어야  한다면 죽을지언정 교리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하고 고집하였다.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볏짚을 썰 때 쓰는 작두를 가져오게 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죽인다고 엄포해도 교리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목을  이 작두

     에 넣어라."

     "왜 제게 그런 명령을 하십니까?"

     "몹쓸 녀석! 목숨을 걸고라도 천주를 섬기겠다고 말하니 너를 죽이

     려고 그런다."

     "제가 천주를 숭배하기 때문에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그러면 목을 작두날 밑에 들이밀겠습니다."

     하인들은 감히 작두의 발판을  밟아 누르지 못했고 아버지는 소리

     쳐 울면서 다른 데로 가 버렸다.

 석두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었다.  3년 동안을 그는 말한마디 하지 않고 진짜 벙어리처럼 지냈다. 이로 인해 온 집안식구들은  걱정이 되어 그의 벙어리병을 고치려고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해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석두는 부모가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서 "아버지"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네가 말을 하다니"하고 깜짝 놀랐다.
   "저는 벙어리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엄금하셨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 교리가 어떤 것이냐? 내가 좀 읽어 보게 그 책들을  가져오너라."

    그의 아버지는 책을 읽어 보고 나서 슬픔과 경탄으로 가득 차서 그 고장에 교리 선생이  있는지를 알아 보게 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교리 선생 한 분을 모셔오너라. 이왕 우리가 이 교리를 배울 바에야 몰래 믿지 말고 드러내 놓고 믿자꾸나."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입교했고 가족도 모두 입교하였다.  그것은 1839년 박해가  있은 뒤의 일이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외교인들까지도 석두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 않은  그의 예의 범절에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다가 페레올  주교가 한국에 입국하게  되니 황석두 루가는 이 성교회를  위해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천주님께  서약하였다.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하는 조건 아래 황석두를 사제품에 올릴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는 당시 한국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어 그의 부인이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아버자기 사망하고부터는  그의 친척들이 집안일을 맡아 보면서 아버지의 가산을 횡령하였으므로  황석두도 자기 유산마저 친척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리하여 가족들은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황석두는  좀더 효과적으로 가족을 도우려고  신자들의 신용말고는 다른 자본도 없이  여러 가지 불행한 투기를 하였으나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파산시키는 일밖에 성공한 일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맺고 있는 황석두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그에게 돈을 꾸어 주는 사람들이 황석두를 함정에  빠뜨리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출입을  금하였다. 이 일종의 추방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1858년 페롱 신부는 황석두에게 그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도록 결심시키고 그를 한문선생으로 채용했다. 

   그 뒤 페롱 신부가 황석두 루가에게 전교회장의 일을 맡기게 되자 그는 이 회장직분을 가장 훌륭하게 열성적으로 이행해 나갔다. 

     "황석두는 내가 공소에  가서 성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따라다녔는데 나는 그가 교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  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고 이 선교사는 증언했다. 

   황석두는 조안노 신부 밑에서  회장이 되었다가 다시 베르뇌 주교밑에서 회장이 되어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  발간에 기초원고를썼다. 그리고  다시 다블뤼 주교를  도아서 번역출판과 그  교정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여 선교사나 신자들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빚을 갚는  데 썼다. 이리하여 모든  이들은 다시 그를 신용하게 되었고 그의 채권자들 조차도 그에게 많은 존경과 애착을 보여 주었다. 

  그러던 중 3월 11일  다불뤼 주교가 체포되었을 때 석두는 자기의 영적 스승이요, 아버지인 주교를  따라 가기를  원해서 포졸들에게 자기가 주교의 제자라고 말했다. 그 때 다블뤼 주교가,"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말하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에서는 같이 살았는데,"하고 대꾸했다. 포졸들이 '오지 말라'고 하면서 그가 주교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포졸들은 그 역시 죄인으로 잡아서서울로 데리고 갔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관리들에게 한결같이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한때 "상부의 명령을 완화해서 이 사람을 살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열의가 너무  대단해서 오히려 관리들은 더 가혹하게 곤장으로 치게 하였다. 옥살이 4일째인 1866년 3월23일 드디어 군문효수라는 사형언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고 있었고 또 그의  혼인날도 한달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사람의 피를 서울땅에서 흘리게 되면 국혼에 해롭다 하여 400리나  떨어져 있는 충청도 보령고을 수영에  있는 반도로 데리고 가서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들은  즉시 임금의  윤허와 함께  보령의 갈매못에  압송되어1866년 3월  30일 금요일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감옥에서 마지막 식사를 손에 받아든 황석두 루가는 "우리는  지금 천주님이 창조하신 음식을 마지막 으로  먹습니다."하면서 기꺼이 먹었다. 그 리고 기도에 몰두하였다. 

   다블뤼 주교가 처형될 때  망난이가 첫번째 칼을 내리치고 나서돈을 더 내라고 하며  오래 흥정을 하는 동안  황석두 루카는 위앵 신부가 겁을 질려 울며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즉시 신부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에 위앵 신부는 다시 힘을  얻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른 두 신부들의 순교에  이어 황석 루카의 차례가 되자  용감하고 침착하고 즐거음이 넘쳐 흐르는 표정으로 참수헤 임하였으니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의 시체는 3일이 지나서야 안주교와 함께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가 얼마 뒤 그의 아들이 와서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는데 오뉴월 이었으나 시체는 하나도 썩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가톨릭신문  <발행일 : 2011-07-31 [제2757호, 14면]>  발췌내용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등과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한 황석두(루카) 순교자. 그의 영성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선교회가 있을 만큼 의미가 있으며, 우리들에게 친숙하다.
 황석두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그를 가르치던 한문선생의 권고로, 또는 우연한 기회에 천주교인을 알게 돼 인연을 맺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그의 가문이 전통적 천주교 가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이야기에 의하면,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어느 날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을 알게 된다. 교리를 배우다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일찍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를 냈다. 그렇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한 그는, 이에 감동한 아버지와 가족들을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했다.
 이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황석두는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이후에는 아예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았으며, 사제가 되기 위해 다블뤼 신부에게 몇 년 동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아내가 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사제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공부를 그만두고, 서천 산막골로 이사해 1858년 페롱 신부의 복사, 교우촌의 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전교활동을 도왔으며, 함께 교회서적을 번역하기도 할 만큼 교회의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황석두 역시 1866년 병인박해가 휘몰아칠 당시 순교했는데, 홍주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가 체포되자, 자신을 체포하지 않는 포졸들에게 직접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당부해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고 전해진다.
 포도청의 신문과정에서도 황석두는 ‘대군대부’인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 했으며, 3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달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돼 목이 잘렸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후 황석두의 형의 아들이자 양자였던 황천일(요한)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본가로 옮겼다가 홍산 삽틔에 장사지냈다고 전해진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돼 현재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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